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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양군(大陽君) 신도비문(神道碑文)

 

우리나라 정씨(丁氏)는 애당초 중국(中國) 당(唐)에서 옮겨온지 1천여년의 유구(悠久)한 세월(歲月)이 흐른 오늘에 이르러서 당당히 국중(國中)의 대성(大姓)이 되었다. 지금 전라남도(全羅南道) 신안군(新安郡) 압해면(押海面) 정승(政丞)골 자좌원(子坐原)에 대양군(大陽君)의 묘(墓)가 있고 묘비(墓碑)에 [대승상대양군정공지묘(大丞相大陽君丁公之墓)]라 하였으니, 곧 정씨(丁氏)의 시조(始祖)이다.

 

휘(諱)는 덕성(德盛)이요, 당(唐)나라 덕종(德宗) 정원(貞元)16년 경진(庚辰), 서기 800년 10월 13일에 남양(南陽) 대천리(大川里)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몹시 총명(聰明)하였고, 자라나서 성철(聖哲)의 글을 부지런히 읽었으며, 품성(稟性)이 뛰어나고 기개(氣槪)가 비상(非常)하였다. 헌종(憲宗) 갑오(甲午)에 문과(文科) 제일(第一)에 올랐으나, 나이는 겨우 15세였다. 그 해 4월에 대박사(大博士)에 올랐다. 또한 문종(文宗)때 대승상(大丞相)이 되고, 무종(武宗)때에는 대양군(大陽君)의 봉작(封爵)을 받아 지극(至極)한 은총(恩寵)을 누리었다. 그때 무종(武宗)은 공(公)을 위하여 생신(生辰)에 잔치를 열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왕영(王英)에게 명하여 시(詩)를 써서 바치게 하고, 내인(內人)으로 하여금 그 시(詩)를 무늬로 넣어 비단(緋緞)을 짜서 하사(下賜)하니, [수성광채촉남천 조견군가대모연 학가원래운외객 예정소인동중선 춘풍우숙요지과 향설증개옥정연] (壽星光彩燭南天 照見君家玳瑁筵 鶴駕遠來雲外客 霓旌笑引洞中仙 春風又熟瑤池果 香雪曾開玉井蓮) 이라 축하(祝賀)하고, 전천옹(全天翁)은, [일점상광촉상대군가금일수연개 장생불노강녕복 도재단청묘이래] (一點祥光燭上臺君家今日壽筵開 長生不老康寧福 都在丹靑妙裏來]라고 직금시(織錦詩)를 지어 축복(祝福)하였다.

 

선종(宣宗) 계유년(癸酉年) 조정(朝廷)에서 국사(國事)에 불리(不利)한 큰 일이 있었을때, 공(公)은 이를 타개(打開)하기 위한 고견(高見)을 충직(忠直)한 글로 올렸으나, 이 글의 완강(頑强)한 내용(內容)이 선종(宣宗)의 노여움을 사서, 멀리 신라(新羅)로 찬류(竄流)되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압해(押海)에 닿은 때는 바로 신라(新羅) 문성왕(文聖王) 15년(서기 853년)이요, 공(公)의 나이는 54세였다.

 

그 뒤 신라(新羅) 헌안왕(憲安王)이 공(公)에게 국중(國中)으로 들어올 것을 청(請)했으나, 공(公)은 [본국(本國)에서 죄(罪)를 얻은 사람이 무슨 낯으로 귀국(貴國)의 도성(都城)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나를 이 변방(邊方)에 버려 두는 것이 좋으리라.]하고, 이내 압해(押海)에서 머물렀다. 20년후 임진(壬辰)에 당(唐)나라 의종(懿宗)12년이요, 공(公)의 나이는 74세였다. 의종(懿宗)은 유환(宥還)의 조서(詔書)를 내렸으나, 공(公)은 글을 올리되, [신(臣)의 나이가 늙고 병(病)이 깊어, 험(險)한 바다길에 배를 타고 돌아갈 수 없고, 또 이 땅 역시(亦是) 예의(禮儀)를 숭상(崇尙)하는 나라인바, 신(臣)에게 이 나라에서 길이 살 수 있는 은택(恩澤)을 내려 주옵소서]하였다. 그러나, 의종(懿宗)은 조서(詔書)를 다시금 내리매, 공(公)은 또 글을 올려 [신(臣)의 나이가 백세(百歲)에 가까워 늙고 병들어 명(命)이 조석(朝夕)에 걸렸사오니, 원(願)컨대 신(臣)을 이곳에 버려 두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거듭 사양(辭讓)하였다. 그리고, 끝내 당(唐)나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진성여왕(眞聖女王) 7년 계축(癸丑)(서기 893년) 3월 1일에 졸(卒)하였으니, 곧 당(唐)나라 소종(昭宗) 경복(景福) 2년이요, 춘추(春秋)는 94세였다. 공(公)은 2남1녀를 두었는데, 열도(烈道)는 16세에 문과(文科) 제3에 올라 예문관 태학사(藝文館 太學士)를 거쳐 대사마 대장군(大司馬 大將軍), 35세에 대양군(大陽君)을 모시고 동래(東來) 하여 헌안왕(憲安王)때, 오성군(筽城君)에 봉(封)하여졌고, 응도(應道)는 17세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여, 태자궁설서(太子宮說書)를 거쳐 우부상서(右部尙書)에 올라, 32세때에 형(兄) 열도(烈道)와 함께 대양군(大陽君)을 모시고 동래(東來)하여, 금성군(錦城君)에 봉(封)하였으며, 사위 김성구(金聲九)는 신라(新羅)의 태사(太師).중서금(中書今)이었다. 열도(烈道)의 계자(系子) 필랑(必琅)은 태사(太師)요, 응도(應道)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필랑(必琅)은 출계(出系)하고, 필진(必珍)은 의창군(義昌君)이요, 필전(必琠)은 옥당박사(玉堂博士)요, 사위 김휘(金暉)는 문경왕자(文景王子) 효성대군(孝誠大君)이었다. 이곳 압해(押海)에는 이른바 사군(四君)의 묘(墓)를 함께 모시었으니, 대양군묘(大陽君墓)를 중심으로 청룡(靑龍)에는 금성군묘(錦城君墓)가 있고, 백호(白虎)에는 의창군묘(義昌君墓)가 있으며, 군암봉(群岩峰) 밑에 따로 한 국(局)을 열어 오성군묘(筽城君墓)가 있다. 그 뒤 후손(後孫)이 번연(繁衍)하여, 영성(靈城), 금성(錦城), 선창원(先昌原), 후창원(後昌原), 의성(義城)등의 5관(貫)으로 나누어졌으나, 압해 (押海)를 그대로 쓰기로 한다.

 

이제 후손(後孫)들이 여기에 정성(情誠)을 모아 신도비(神道碑)를 세우려 하여, 불녕(不) 가원 (家源)에게 글을 청(請)하매, 삼가 족보(族譜)에 실린 공의 행장(行狀)을 참고(參考)하여 이와 같이 서술(敍述)하고, 뒤에 명(銘)을 붙인다.

 

압해(押海)섬 정승(政丞)골에 높이 누운 이 어른이 당(唐)에서 처음 오신 정씨(丁氏)의 시조(始 祖)시다. 천년(千年) 넘은 오늘날에 그 역사(歷史)는 아득하여 이방(異邦)의 귀양살이 스무 해가 흘렀더니 무슨 죄(罪)가 진중턴고. 남은 한(恨)이 많건만은 신라(新羅)는 예의(禮儀)나라 편안 (便安)히 머물리다 후손(後孫)이 번영(繁榮)하여 큰 선비 높은 벼슬 끊이지 아니하여 온 겨레에 빛이 됐소. 대승상(大丞相) 옛 비(碑)곁에 이 돌을 높이 세워 뽕밭 푸른 바다 되어도 길이길이 보존하리.

 

기유광복초계해(己酉光復初癸亥:1983년) 유두절 상한(流頭節 上澣)

외예문학박사(外裔文學博士)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 근찬(謹撰)

후손(後孫) 규철(奎哲) 근서(謹書)

 

  

 당(唐)대양군(大陽君)정공(丁公)덕성(德盛)지(之)추모비문(追慕碑文)

 

한국정씨(韓國丁氏)는 모두 대양군(大陽君) 정덕성공(丁德盛公)의 혈손(血孫)이다. 한국정씨(韓國丁氏)의 역사(歷史)는 중국(中國)당조(唐朝) 말기(末期)에 이곳 대하둔(大河屯) 정영촌(丁營村)에 서 태어나신 덕성공(德盛公)이 54歲때 한국(韓國)으로 찬류(竄流)되신이래(以來) 그 혈손(血孫)이 현재(現在) 20餘萬에 이르렀다. 전년(前年)에는 당하현(唐河縣)의 정씨문화연구회(丁氏文化硏究會) 의 끈질긴 추적(追跡)으로 덕성공(德盛公)의 과방록(科榜錄)이 발견(發見)되어 우리 한국정씨(韓國 丁氏)는 이루 그 기쁨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에 이곳 대하둔(大河屯) 정영촌(丁營村)에 공(公) 의 혈손(血孫)들이 그 기쁨을 담아 공(公)을 기리는 추모비(追慕碑)를 세운다.

대양군(大陽君) 덕성공(德盛公)[공원(公元)800-893]은 당조(唐朝)정원(貞元)16년 10월 13일 하남성 (河南省) 남양대천리(南陽大川里)[현(現)대하둔(大河屯)정영촌(丁營村)]에서 탄생(誕生)하시고, 원화(元和)10년[공원(公元)815년]에 16歲의 약관(弱冠)으로 진사과(進士科)에 급제(及第)하시고, 이후 태자궁설서(太子宮說書)를 역임(歷任)하실때 회서(淮西)오원제(吳元濟)의 반란(反亂)이 일어 나자 태자궁첨사(太子宮詹事) 이소(李遡)와 함께 이를 평정(平定)하신 공(功)으로 현백(縣伯)의 벼슬과 식읍(食邑) 700호(戶)를 받으시고 문무종(文武宗)때에는 대상(大相)과 아울러 대양군(大陽君)의 작위(爵位)를 받으셨다. 선종(宣宗)때에는 조정(朝廷)의 국사(國事)에 직언(直言)으로 상소(上疏)하신 것이 선종(宣宗)의 노여움을 사서 대중(大中) 7년[공원(公元)853년] 공(公)은 54歲때 신라(新羅)로 찬류(竄流)되니 두 아드님 열도(烈道)오성군(筽城君)과 응도(應道)금성군(錦城君)을 데리고 신라(新羅) 압해도(押海島)에 정착(定着)하여 영주(永住)하셨다.

 

공(公)은 신라조정(新羅朝廷)에서 수도(首都) 경주(慶州)로 들어와 살기를 권(勸)하였으나, 굳이 사양(辭讓)하셨고, 20년의 유배(流配)가 풀리자 여러차례 중국(中國)으로 환국(還國)하라는 칙령(勅令)이 있었으나, 신라(新羅)도 예의지국(禮儀之國)이라 사양(辭讓)하여 머물러 사시다가 소종(昭宗景福)2년[공원(公元)893년] 3월 1일 94歲의 천수(天壽)를 누리고 영면(永眠)하시니 압해도 (押海島)에 안장(安葬)되었다.

 

공(公)이 서거(逝去)하신지 1108年만에 우리 혈손(血孫)들이 공(公)의 탄생지(誕生地)인 대하둔(大河屯) 정영촌(丁營村)에 공(公)을 기리는 추모비(追慕碑)를 세우니 참으로 감개무량(感慨無量)하여 추모(追慕)의 눈물을 금(禁)할 수가 없도다. 우리 후손(後孫)들은 공(公)이 남겨놓으신 대덕(大德) 과 대의(大義)의 정신(精神)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공(公)을 기리는 큰 뜻이 될 것이다. 후손(後孫)들이여 이를 명심(銘心)할지어다.

 

공원(公元) 2001년 6월 한국정씨대종회(韓國丁氏大宗會) 근수(謹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