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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 열(丁 悅)

충효공(忠孝公) 열(悅) 할아버지는 시조 대양군의 13세손이며 금양부원군 성휘(聖徽)의 아들로 991년 신묘 12월20일 의창부에서 출생하셨다. 약관의 나이로 고려 현종 원년(1010)에 과거에 등과하여 중랑장(정5품의 무관직)을 시작으로 밀직부사 추밀원 직학사 내사사인 병부사겸 내외 도총령 문하시중 평장사(정2품벼슬)을 지내셨다.

 

거란병란 때에는 공의 빙부이며 도원수인 강감찬과 강민첨 장군의 부원수로 공을 세워 ‘검교 태전 대장군 상주국 좌리 동덕 공신’을 지내셨으며, 조정에서 작을 내려 의창부 개국 남작 식읍 700호에 예호병이부사 삼중대광 동삼사 평장사 태자 태부 내사령의 벼슬을 받으셨다.

 

1179년 7월16일 졸하여 진주 석갑산에 장사하였으며 고려 순종이 충효공(忠孝公)의 시호를 내렸다.

* 정언진(丁彦眞)

시조의 18세손인 언진(彦眞) 할아버지께서는 문무를 모두 갖춘 고려의 명장이다. 일찍이 과거에 등과 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1202(신종5년)에 대장군이 되고 다음해 경주에 반란이 일어나자 반란도배들을 토벌한 공으로 지문하성사(종2품의 벼슬)와 도원수의 벼슬에 오르셨다.

 

1209년 우리나라의 최초라 자부할 수 있는 우리 정씨 세적서(족보의 서문)을 쓰시며 “우리 정씨의 족훈(族訓)은 돈목(敦睦)” 이라고 밝혀 80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우리의 족훈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고려조 1214년 4월에 졸하셨다. 이 할아버지의 장자인 건(健)의 자손들이 창원(선) 정씨의 선조이시고 둘째 복(復)의 자손들이 의성 정씨의 선조이시다.

* 정공수(丁公壽)

공수(丁公壽) 할아버지께서는 금나라 군사를 막고 북쪽 국경의 주민들에게 어진 정치를 베풀어 추앙을 받았던 덕장(德將)이시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의주 선유사 조염경이 상소하기를 “정공수, 조충, 김유구 등은 청렴결백하여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기 가족같이 하는데 나머지 관료들은 탐욕이 많고 잔학하며 폭악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살을 벗기며 뼈를 긁어서 그 괴로움을 견딜 수가 없어 반란이 일어났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이리하여 안영린 등 탐관오리 10여명을 귀양보냈다> 라고 그 분의 공적을 전하고 있다. 공은 1226년 추밀원 부사, 상서, 우복야를 지내고 다음 해에 중군병마사로 침입해 온 동여진을 방어하려고 19세손 순우(純祐) 장군과 같이 정주, 평주로 출전했다가 패전하여 남경유수(지금의 서울시장 격)로 좌천되었다.

* 정 찬(丁 贊)

찬(贊) 할아버지께서는 시조 대양군의 23세손이며, 중시조 진(晋)의 손자이시다.

고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공민왕 11년(1362)에 밀직부사가 되신 후에, 최영장군도 토벌치 못한 함경도 일대의 변란을 평정한 공으로 지밀직사사로 승진하고 영성군(靈城君)에 봉군 되었다. 이성계 등과 함께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였으며, 후에 휘하 장수 목충의 간교한 음해로 인해 옥중에서 졸하셨다(1364년).

 

고려사와 동국병감에 의하면 <세상 사람들이 몹시 애석하게 여겼다>고 쓰여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한 후에도 공과의 우정과 충성심을 잊지 못하여 영의정으로 추증(追贈)하여 공의 넋을 위로 하였다. 그 뒤 조선 영조36년(1759) 영광군 군남면 도장리(장고매)에 장산사를 세우고 춘추로 봉향하고 있다.

* 정영손(丁令孫)

의성군(義城君) 영손(令孫) 할아버지, 호(號)는 몽송(夢松),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때 벼슬에 오르시고, 1389년(창왕 1)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셨으며 1390년(공양왕 2)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朝鮮開國)에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셨으며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지셨고 좌찬성(左贊成)에 오르셨다. 의성군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의성파이다

* 정몽길(丁夢吉)

세종조 무오에 문과 갑과에 등과하여 가의대부 호주참판 삼도 관찰사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을 지내시다 공께서 경북 신령(영천)에 시거(始居) 하시어 500 여년간 공의 후손이 대대로 번창하다.

* 정극인(丁克仁)

1401(태종 1)∼1481(성종 12).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헌(茶軒) 또는 다각(茶角). 광주(廣州)출신. 진사 곤(坤)의 아들.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고, 1437년 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대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그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다. 그 뒤 풀려나 태인으로 남귀(南歸), 초사(草舍)를 짓고 불우헌이라 명명, 자호로 사용하셨다. 불우헌 앞 필수천(泌水川)주변에 송죽을 심고 밭을 갈며 향리자제를 모아 가르치고, 향약계축(鄕約契軸)을 만들어 풍교(風敎)에 힘쓰셨다.

 

1451년(문종 1) 일민천거(逸民薦擧)의 은전으로 광흥창부승(廣興倉副丞)이 되어 은일(隱逸) 6품(六品)을 받았고, 이어 인수부승(仁壽府丞)으로 있다가 1453년(단종 1) 한성판관 성순조(成順祖)의 역권(力勸)으로 전시(殿試)에 응시, 급제하여 김수령방(金壽寧榜) 정과(丁科)13명에 들었다. 1455년 단종이 세조에게 선위하자 전주부교수참진사(全州府敎授參賑事)로 있다가 그 직을 사임하고 태인으로 돌아갔다.

 

그 해 12월 조정에서는 인순부승록(仁順府丞錄)으로서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4등을 내렸다. 이로부터 다시 출사하여 약 10년간, 네번의 성균관주부, 두번의 종학박사(宗學博士)를 지내고, 사헌부감찰 및 통례문통찬(通禮門通贊) 등을 역임, 69세 때 태인현 훈도로 있다가 사간원헌납으로 다시 전하여 조산대부 행사간원정언(朝散大夫行司諫院正言)으로 특승되셨다. 그러나 1470년(성종 1) 치사, 귀향하여 후진양성에 힘쓰셨다. 1472년 영달을 구하지 않고 향리 자제를 교회(敎誨)한 공으로 3품산관(三品散官)의 은영(恩榮)이 내리자 이에 감격, 〈불우헌가 不憂軒歌>〈불우헌곡 不憂軒曲〉을 지어 이를 송축하였다. 비록 환로의 영달은 없었으나 선비로서의 지개와 풍도를 고수하였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81세로 졸하셨다. 문학에도 특출한 재능을 보여 최초의 가사작품으로 알려진 〈상춘곡〉과 단가(短歌)〈불우헌가〉, 한림별곡체(翰林別曲體)의 〈불우헌곡〉 등을 지어 한국시가사에 큰 공헌을 하셨다. 예조판서 겸 지춘추관성균관사에 추증되셨다.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 배향되었다.

* 정 걸(丁 傑)

송정공(松亭公) 걸(傑) 할아버지는 극인(克仁)의 6세손이고 숭조(崇祖)의 둘째 아들로 중종 병자(1516) 12월 1일에 태어났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명종 때에 부안 현감 등의 관직에 있으면서 왜구를 물리쳤으며, 경상우수사, 전라좌수사, 전라병마절도사, 경상병마절도사 등을 지내시며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이를 칭송하는 청덕비까지 세웠다.

 

임진왜란 때에는 남해안 일대를 책임지는 조방장으로 이순신 장군의 대 선배로 작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이순신 장군도 정령공(정 장군을 아주 높여서 부르는 존칭)이란 호칭으로 불렀으며, 충청수군 절도사로 충청도 앞바다를 지킬 때 권율장군이 이끄는 행주산성에서 화살이 바닥나서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을때 화살 두배를 싣고와서 적의 배후를 공격하여 치명타를 입혀 적을 전멸시켰다. 왜적이 서울을 빠져 나가고자 할 때에 당시 병조판서와 정걸 장군에게 서한을 보낸 사실만 보아도 그 분이 얼마나 적에게 무서웠는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천경장경이라는 철을 뚫고 들어가는 병기를 만들어 적의 철선을 부수고, 판옥선, 곡방패, 화전, 철익전, 화경소 등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가는 곳마다 크게 이겼다. 후에 영조 때에 어사 이이장이 판옥선을 보고 왕께 말하기를 “이 배가 너무 오래되어 쓸모가 없으니 해체함이 옳을 듯 합니다”라고 하였더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판옥선은 옛날 명장 정걸 장군이 만든 것이니 그대로 보존하라”라고 할 정도였다.

* 정경달(丁景達)

정경달 할아버지는 1542년 장흥군 장동면 반산리에서 태어나 문과에 급제 벼슬이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며 자는 이회(而晦)요 호는 반곡(盤谷)이다. 임진왜란이 시작될 당시 경상도 선산 부사로 있으면서 많은 군사를 모아 경북 금오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1594년에는 당시 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계청(啓請)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이때 세운 전공이 책록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였다. 한때 이순신이 원균(元均)의 모함으로 투옥되었을 때 조정에 나아가 왕에게 “이순신의 애국심과 적을 방어하는 재주는 일찍이 그 예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전쟁에 나가 싸움을 미루는 것은 병가의 승책(勝策)인데 어찌 적세를 살피고 싸움을 주저한다 하여 죄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왕께서 이 사람을 죽이면 나라가 망하겠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고 이순신의 석방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발발시부터 난중일기(亂中日記)를 썼는데 이순신이 주로 해전에서의 상황을 쓴데 반해 선생은 내륙사정도 함께 기술하였다. 정유재란 당시는 평안도 용천?정주?곽산에서 난을 맞은 기록이 있어 학계에서는 왜란 당시 남도의 상황을 상세하게 알수 있고 종사관직에 있는 이후 기록으로는 대외교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이용하고 있다. 1602년 영면하였다. 장동면 반산리 반계사에 배향되었다. 선생이 남긴 『난중일기』『진법(陣法)』과 『광국공신계회도(光國功臣契會圖)』『흉배(胸背)』『공신록권(功臣錄券)』등이 1988년도에 지방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 정 황

유헌공 정황 할아버지,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계회(季晦), 호는 유헌(遊軒). 아버지는 사산감역(匹山監役) 세명(世明)이며, 어머니는 사의(司議) 김수형(金壽亨)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2(중종 7)∼1560(명종 15).

 1536년(중종 31)친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지평(持平), 병조정랑(兵曹正郞), 형조정랑 등을 지냈다.

 

1544년 정랑으로 있을 때 간관에 의하여 6품 미만의 자급(資級)으로 정5품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관작외람(官爵猥濫)의 논박을 받기도 하였다.

 

1545년(인종 1)수렴청정하던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인종의 장사(葬事)를 서둘러 갈장(渴葬)으로 치르려고 하는 데 대하여 당시 모든 관원들이 그 기세에 눌려 침묵하고 있을 때 극력 반대하여 의례대로 장사를 거행하게 하였다.

 

1546년(명종 1)검상을 거쳐 사인으로 있을 때 을사사화가 일어나 소윤 윤원형(尹元衡) 등의 외척이 권세를 잡자 그 일파인 이기의 논계로 인하여 파직, 남원으로 돌아갔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곤양에 유배, 이듬해 거제로 이배되었고, 배소에서 죽었다. 천품이 정직하고 항상 효제충신(孝悌忠信)으로 입신의 근본을 삼았다.

 

1708년(숙종 34)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남원의 영천서원(寧川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 《유헌집》 4권 3책과 배소에서 지은 《부훤록 負暄錄》《장행통고 壯行通考》 각 10권이 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 정 현(丁 炫)

이숙제(夷叔齊)공 현 할아버지는 세종 때 이조판서로 하였으며, 후에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불의와 타협할 수 없다는 신조로 벼슬을 훌훌 털어버리고 금산(지금의 전북 진안 용담)에 은둔하시며 단종임금의 복위를 빌었는데 단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충성 어린 뜻을 다지시어, 그 충절에 감복한 그 때의 인사들이 옛 중국의 백이숙제와 같다고 하여 공의 호를 이숙제(夷叔齊)라 칭하였다.

정약용(丁若鏞)

다산 정약용 할아버지는 조선 말의 대학자로 자는 송보.미용, 호는 다산.사암, 당호는 여유당, 천주교 세례명은 요한, 시호는 문탁이다. 다산은 1789년 정조 1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당시 정조는 정약용, 박지원, 박제가 등 진보적인 학자들을 곁에 두고 서양문물의 수용과 농업정책 개혁에 관한 이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였다. 다산 할아버지는 문장과 경학에 뛰어났으며 기중기 설치에 의한 활차로 수원성 축조에 이용하여 뛰어난 과학기술능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801년(순조1년) 신유박해 때 장기 유배된 뒤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에 유배되어 민생을 위한 경세의 학문에 뜻을 두고 19년간 독서와 저술에 힘써 학문적인 체계를 완성했다. 다산 공은 장기간 유배생활의 고통 속에서도 학문적 체계를 완성하고 실학의 대가가 되어 < 목민심서 >, < 경세유표 > 등의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1910년(융희 4년) 정헌대부(정2품) 규장각 제학에 되었고 문도공(文度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다산 공이 처음으로 사회현실에 눈뜨게 된 것은 그가 규장각 홍문관 등 중앙 관서에 몸담았다가 서른 세살 때 경기암행어사를 지낸 시절이었다. 그 후 그는 천주교와 관련한 무고와 연좌제로 말미암아 지방 하위 관리직을 전전했다. 실학(實學)은 제도개혁과 농민문제에 주로 관심을 가졌던 경세치용학파, 기술개혁을 주창하여 도시의 상인, 수공업자와 맥이 닿아 있던 이용후생학파, 그리고 청대(淸代)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학문을 근대과학으로 발전시키는 데 기여를 한 실사구시학파 등으로 나뉜다. 다산 공은 인맥으로는 경세치용학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실제로 그의 높은 학문 수준은 실학의 세 유파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이 다산 공을 실학의 집대성자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